상처를 넘어 용서와 은혜로: 내 안의 쓴 뿌리 치유하기
사람은 누군가로부터 인격적 모독이나 배신을 당할 때 마음 깊은 곳에 지우기 힘든 상처를 입습니다. 그리고 이 상처는 마음속에 쓴 뿌리가 되어 우리의 성품과 내면에 악영향을 미치곤 합니다. 특히 인생을 살아가며 예상치 못한 실수나 잘못을 저질렀을 때, 주변의 지나친 질책과 비난은 우리를 쓴 뿌리의 올무에 더욱 깊이 얽매이게 만듭니다.
세상 사람들은 다투고 나면 술 한 잔 기울이며 가볍게 털어내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 믿는 사람들끼리 다투면 하나님도 못 말린다”는 씁쓸한 우스개 소리가 있습니다. 왜 이런 말이 생겨났을까요?
우리는 불신자들에게는 어느 정도 허물을 기대하며 관대하게 대하지만, 목회자나 장로, 권사, 집사 등 믿는 이들에게는 도덕적·윤리적으로 더 높은 기대를 품습니다. 그러나 그 기대가 무너지는 순간, 불신자에게 받은 상처와는 비교할 수 없는 거대한 배신감과 아픔이 찾아옵니다.
기대가 무너진 자리, 깊은 상처와 배신감
신앙 안에서 맺힌 상처와 분노는 쓴 뿌리가 되어 수시로 우리의 심령을 괴롭힙니다. 흔히 인간성을 시험해보려면 금전 거래나 도박을 해보라고 말하듯,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서로 권면하고 책망하는 과정에서 큰 상처를 주고받곤 합니다.
특히 믿었던 목회자의 야비하고 비열한 면모를 보았을 때, 평신도들이 받는 충격은 신앙생활 전체를 흔들 만큼 치명적입니다.
평신도가 교회에서 가장 큰 상처를 받는 순간은 대개 교회를 향한 진심 어린 쓴소리를 건넸을 때 찾아옵니다. 투철한 소명의식이나 올바른 신앙관이 정립되지 못한 리더는 그 충고를 겸허히 받기보다 감정적으로 받아들이며, 없던 사실까지 지어내어 상대방을 방어하려 들기도 합니다.
강단에서 일방적으로 왜곡된 말을 만들어내어 비방하고, 하나님의 권위라도 된 듯 한 성도의 믿음까지 재단할 때, 그 당사자가 겪는 참담함과 당혹감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결국 그러한 일을 겪은 많은 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나아가 하나님과의 관계마저 멀어지게 됩니다. 영혼을 인도해야 할 자리가 오히려 영혼을 실족하게 만드는 걸림돌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 엄중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달려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마 18:6)
또한 남을 쉽게 판단하거나 업신여기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롬 14:10)
믿는 자의 말과 행동은 표리부동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언행은 한 영혼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디딤돌이 되어야지, 결코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쓴 뿌리의 실체와 그 해악
그렇다면 쓴 뿌리란 과연 무엇일까요? 쓴 뿌리는 독성을 품은 뿌리와 같아서, 다른 선한 식물의 성장을 가로막는 잡초처럼 수많은 사람에게 해를 끼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를 다음과 같이 경고합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지 않게 하라” (히 12:15)
월터 A. 헨릭슨은 저서 《훈련으로 되는 제자》에서 쓴 뿌리에 대해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쓴 뿌리는 스스로 냉대받았다고 느낄 때 생겨나지만, 실제로 냉대를 받지 않았더라도 오해에서 비롯되기 쉽다. 경쟁적인 태도나 소통의 실패, 부당한 취급을 받았다는 감정에서 발전하며,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그 어떤 것보다 무기력하게 만든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언제든 마음에 상처를 입을 수 있습니다. 진짜 문제는 상처를 받는 것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하나님의 방법으로 치유하지 않고 방치하는 데 있습니다.
방치된 상처는 마음속 깊이 파고들어 쓴 뿌리가 되고, 결국 쓴 열매를 맺어 타인의 마음에까지 상처의 씨앗을 퍼뜨리게 됩니다. 내 안에 쓴 뿌리가 남아 있을 때 나타나는 증상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1. 심령과 육체를 괴롭힙니다.
마음이 괴로우면 육체도 병들기 마련입니다. 쓴 뿌리는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까지 말과 행동으로 찌르고 괴롭게 만듭니다. 조기에 도려내지 않은 암세포처럼 온 몸으로 전이되어 결국 영적 생명을 갉아먹습니다.
2. 많은 사람에게 전염됩니다.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게 된다”는 말씀처럼, 쓴 뿌리는 전염성이 강합니다. 불평과 원망, 비판의 악성 병균이 공동체 전체를 오염시키게 됩니다.
십자가의 은혜와 용서라는 특효약
억울하고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 우리는 십자가에서 모든 수모를 당하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머리에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채찍에 맞으며, 양손과 양발에 못 박히신 채 물과 피를 다 흘리시기까지 멸시와 천대를 참아내신 주님을 생각할 때, 우리가 받은 상처가 얼마나 보잘것없고 부끄러운 것인지 깨닫게 됩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마 18:18)
모든 엉킨 매듭과 억울함을 주님 앞에 내려놓아야 합니다. 하지만 내 힘과 내 뜻대로 이것이 쉽게 치유되지는 않습니다. 쓴 뿌리를 뽑아내는 유일한 특효약은 바로 ‘용서’입니다.
진정한 용서는 내 결심만으로 되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가능합니다. 내 안에 있는 분노와 쓴 뿌리를 주님께 온전히 맡겨드릴 때, 주님께서는 보혈의 능력으로 우리의 상처를 씻어내 주십니다.
진주조개는 품속으로 들어온 아픈 모래알을 오랜 시간 인내하며 감싸 안아 아름다운 진주를 만들어냅니다. 이처럼 우리도 교회 공동체 안에서 입은 상처들을 인내와 용서로 승화시켜, 보석처럼 빛나는 믿음의 성품으로 빚어져야 할 것입니다.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골 3:13-14)
“주님, 남의 눈의 티끌만 보지 말고 내 눈의 들보를 보게 하옵소서. 날마다 주님을 닮아 용서하고 용납하는 마음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이 고백과 기도가 우리의 삶 속에서 끊이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용서야말로 쓴 뿌리를 치유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완성하는 온전하게 매는 띠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