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병자 보험, 알리지 않은 병력으로 보장이 끊기는 경우
지병이 있어도 들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가입했다가, 정작 보험금을 청구하는 자리에서 계약이 해지되는 일이 있습니다. 심사 항목이 적은 상품이라 자세히 묻지 않았을 뿐인데 나중에 문제가 되는 것이 이해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묻는 항목이 줄어든 것과 알릴 의무가 없어진 것은 다른 이야기입니다. 무엇을 알려야 하는지, 알리지 않았을 때 보험사가 계약을 해지할 수 있는 조건이 무엇인지, 반대로 해지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는 언제인지가 이 문제의 전부입니다.
1. 계약 전에 알려야 하는 사항의 범위
보험은 위험을 값으로 매겨 파는 계약이라, 위험의 크기를 아는 쪽과 값을 매기는 쪽이 다릅니다. 그래서 계약을 맺을 때 보험계약자와 피보험자가 중요한 사항을 사실대로 알리도록 정해 두었습니다. 흔히 고지의무라고 부르고, 청약서에서는 계약 전 알릴 의무라는 이름으로 나옵니다.
문제는 무엇이 중요한 사항인지입니다. 상법은 이 판단을 계약자에게 떠넘기지 않고, 보험자가 서면으로 질문한 사항은 중요한 사항으로 추정한다고 정해 두었습니다. 청약서의 질문표가 알려야 할 범위를 사실상 그려 준다는 뜻입니다.
이 조항은 양쪽으로 작동합니다. 질문표에 적힌 항목은 사소해 보여도 중요한 사항으로 다뤄지고, 반대로 보험사가 묻지 않은 사항까지 계약자가 알아서 찾아내 신고할 의무를 지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청약서를 어떻게 채웠는지가 나중의 다툼에서 그대로 근거가 됩니다.
병력이 있는 사람일수록 이 지점이 예민해집니다. 해당할 만한 항목이 여러 개인데다 오래된 진료일수록 기억에 기대어 답하게 되고, 그렇게 적힌 한 칸이 몇 년 뒤 보험금 심사에서 다시 열립니다.
2. 해지가 성립하는 세 가지 요건
병력을 알리지 않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계약이 곧바로 해지되지는 않습니다. 상법은 세 가지가 모두 갖춰졌을 때 보험자가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고 정합니다.
- 계약자나 피보험자의 고의 또는 중대한 과실
- 대상이 중요한 사항일 것
- 고지하지 않았거나 사실과 다르게 고지했을 것
세 요건은 함께 충족되어야 합니다. 중요한 사항이 아니었다면 알리지 않아도 해지 사유가 되지 않고, 중요한 사항이더라도 고의나 중대한 과실이 없었다면 조문이 요구하는 요건이 채워지지 않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질문표에 적힌 항목을 알면서 빠뜨린 경우가 이 요건에 가장 가깝게 놓입니다.
3. 해지권이 사라지는 기간
요건이 갖춰졌더라도 보험사가 언제까지나 해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상법은 해지권에 두 개의 기한을 함께 걸어 두었습니다. 보험자가 그 사실을 안 날로부터 1월 내에, 그리고 계약을 체결한 날로부터 3년 내에 한하여 해지할 수 있습니다.
해지권 행사 기한 = 보험자가 사실을 안 날부터 1개월
두 기한은 각각 다른 일을 합니다. 앞의 기한은 보험사가 사실을 알고도 판단을 미루며 계약을 붙잡아 두지 못하게 합니다. 뒤의 기한은 계약이 오래 유지된 뒤에 과거의 고지를 다시 들추지 못하게 합니다. 둘 중 하나라도 지나면 해지권은 사라집니다.
계약을 맺은 지 3년이 넘었다면 그 시점에 알리지 않은 병력이 있었더라도 그 사유로는 계약을 해지할 수 없습니다.
4. 보험사가 알았거나 알 수 있었던 경우
기간과 별개로 해지를 막는 사유가 조문 안에 하나 더 있습니다. 보험자가 계약 당시에 그 사실을 알았거나 중대한 과실로 인하여 알지 못한 때에는 해지하지 못합니다.
위험을 심사하는 일은 보험사의 몫이라는 뜻입니다. 서류에 드러나 있는 사실을 확인하지 않고 계약을 받아들였다면 그 결과를 뒤늦게 계약자에게 돌릴 수 없습니다. 알릴 의무가 계약자에게 있는 것과, 알아볼 책임이 보험사에 있는 것은 함께 작동합니다.
설명이 없었던 경우도 따로 정해져 있습니다. 보험자는 계약을 체결할 때 보험약관을 교부하고 그 약관의 중요한 내용을 설명해야 하며, 이를 위반하면 보험계약자는 보험계약이 성립한 날부터 3개월 이내에 계약을 취소할 수 있습니다.
약관이 상법보다 계약자에게 불리한 조건을 만들 수도 없습니다. 상법 보험편의 규정은 당사자 사이의 특약으로 보험계약자나 피보험자, 보험수익자에게 불이익하게 변경하지 못하도록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5. 해지되어도 보험금이 나오는 경우
가장 오해가 많은 대목이 여기입니다. 계약이 해지되면 보험금도 당연히 못 받는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상법은 그 둘을 나누어 두었습니다. 보험사고가 발생한 뒤에 계약이 해지되면 원칙적으로 보험금 지급 책임이 없고 이미 지급한 보험금의 반환도 청구할 수 있습니다. 다만 알리지 않은 사실이 그 보험사고의 발생에 영향을 미치지 아니하였음이 증명된 경우에는 보험금을 지급할 책임이 있습니다.
인과관계가 인정되는 경우
- 계약: 해지
- 해당 사고의 보험금: 지급 책임 없음
- 이미 받은 보험금: 반환 청구 대상
영향이 없음이 증명된 경우
- 계약: 해지
- 해당 사고의 보험금: 지급 책임 있음
- 이미 받은 보험금: 반환 청구 대상 아님
두 경우 모두 계약은 해지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인과관계가 없다고 증명되어도 앞으로의 보장이 되살아나는 것은 아니고, 이미 벌어진 그 사고에 대한 보험금만 남습니다. 알리지 않은 병력과 무관한 사고였다는 사실을 누가 어떻게 증명하느냐가 실제 다툼의 초점이 되는 이유입니다.
조문이 요구하는 것은 영향을 미치지 아니하였다는 증명입니다. 관련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다는 상태로는 이 단서가 작동하지 않고 원칙으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알리지 않은 병력이 무엇이었는지에 따라 같은 해지라도 결과가 갈립니다.
6. 간편심사 상품에서 줄어드는 고지 항목
유병자를 대상으로 하는 상품은 심사 항목 자체를 줄여 문턱을 낮춥니다. 2018년 4월에 나온 유병력자 실손의료보험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일반 실손의료보험이 18개 항목을 심사하던 것을 병력 관련 3개와 직업, 운전 여부, 월소득을 더한 6개 항목으로 줄였습니다.
무엇을 뺐는지가 성격을 보여 줍니다. 투약 여부는 심사에서 제외됐습니다. 약을 먹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가입이 막히던 구간을 열어 준 것입니다. 반면 최근 2년 이내의 입원, 수술, 7일 이상 치료 여부는 그대로 심사 대상으로 남았습니다.
남은 여섯 항목이 병력만으로 채워져 있지 않다는 점도 눈여겨볼 대목입니다. 직업과 운전 여부, 월소득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질병 이력 말고도 위험을 가늠하는 축이 있다는 뜻이고, 그 항목들 역시 서면으로 물은 사항입니다.
심사를 덜 한다는 것은 보험사가 떠안는 불확실성이 그만큼 커진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문턱을 낮춘 자리는 보험료와 보장 조건에서 차이로 되돌아옵니다. 같은 이름의 실손이라도 조건을 나란히 놓고 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상품군은 계속 넓어지고 있습니다. 2025년 4월부터는 가입할 수 있는 나이가 90세 이하로, 보장받을 수 있는 나이가 110세까지로 늘어났습니다.
여기서 갈리는 지점이 있습니다. 항목이 줄었다는 것은 보험사가 묻는 범위가 좁아졌다는 뜻이지, 답할 의무가 사라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남은 여섯 항목은 서면으로 질문한 사항이므로 중요한 사항으로 추정됩니다. 묻는 것이 적을수록 그 몇 개에 대한 답이 계약 전체를 좌우하게 됩니다.
심사를 생략하는 절차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들어 둔 계약을 심사 없이 다른 계약으로 옮기는 제도가 있지만, 그것은 새로 심사하지 않겠다는 약속일 뿐 계약을 맺을 때 사실대로 알릴 의무 자체를 없애 주는 장치는 아닙니다.
7. 청약서 질문표에 남기는 기록
결국 모든 판단은 청약서에 적힌 내용에서 출발합니다. 질문표를 채우는 자리에서 할 일은 많지 않지만 순서가 있습니다.
- 질문표의 항목을 본인이 직접 읽습니다.
- 기억이 흐린 항목은 진료 기록으로 확인합니다.
- 해당하는 사실을 청약서에 그대로 적습니다.
- 작성한 청약서 사본을 받아 보관합니다.
네 번째가 빠지기 쉽습니다. 설계사에게 말로 전한 병력은 청약서에 옮겨 적히지 않으면 기록으로 남지 않고, 몇 년 뒤에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서류에 적힌 내용뿐입니다. 전자 청약이라면 화면에서 넘어가기 전에 각 항목의 답이 본인이 말한 대로 들어갔는지 보아야 합니다.
계약을 맺은 뒤의 의무는 따로 있습니다. 보험기간 중에 사고 발생의 위험이 현저하게 변경되거나 증가된 사실을 알게 되면 지체 없이 보험사에 알려야 하고, 이를 게을리하면 보험사는 그 사실을 안 날로부터 1월 내에 계약을 해지할 수 있습니다. 계약 전에 알릴 의무와 계약 후에 알릴 의무는 대상도 시점도 다른 별개의 의무입니다.
유병자 보험의 문턱이 낮아진 것은 묻는 항목을 줄여서 얻은 결과입니다. 그 대신 남은 항목의 무게가 커졌습니다. 몇 개 되지 않는 질문에 사실대로 답해 두는 일이 보장을 끝까지 유지하는 조건이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