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험금 청구, 3년이 지나면 사라지는 권리



서랍에 넣어 둔 진단서를 몇 해 뒤에 꺼내 드는 일이 있습니다. 입원했던 기억은 또렷한데 청구를 미뤄 두었거나, 보장 내용을 뒤늦게 알았거나, 보험사와 다투는 사이에 시간이 지난 경우입니다. 이때 가장 먼저 부딪히는 것이 기간입니다. 보험금을 받을 권리에는 정해진 기한이 있고, 그 기한이 언제부터 세어지는지에 따라 같은 사고에서도 결과가 갈립니다. 헷갈리는 지점은 기간의 길이가 아니라 시작점입니다.

1. 상법이 정한 세 청구권의 시효 기간

보험금을 받을 권리는 계약서가 아니라 법이 먼저 기간을 정해 둡니다. 상법 제662조는 보험금청구권과 보험료 또는 적립금의 반환청구권을 3년, 보험료청구권을 2년으로 정하고, 그 기간에 권리를 행사하지 않으면 시효의 완성으로 소멸한다고 규정합니다. 앞의 둘은 계약자와 수익자가 보험사에 대해 가지는 권리이고, 마지막 하나는 보험사가 계약자에게 보험료를 청구하는 권리입니다. 보험료나 적립금의 반환청구권은 계약이 처음부터 효력을 잃거나 중간에 끝났을 때 돌려받을 몫에 관한 권리여서, 보험금과는 다른 국면에서 문제가 됩니다.

이 기간을 약관으로 줄일 수 있는지 궁금할 수 있습니다. 민법은 소멸시효를 법률행위로 늘리거나 무겁게 하지는 못해도 줄이거나 가볍게 하는 것은 허용합니다. 다만 상법의 보험 관련 규정에는 별도의 조항이 있습니다. 이 규정을 당사자 사이의 특약으로 보험계약자나 피보험자, 보험수익자에게 불리하게 변경하지 못한다는 내용입니다.

따라서 약관이 3년보다 짧은 기간을 적어 두었더라도 그 부분은 효력을 인정받기 어렵습니다.

2. 기산점의 원칙, 보험사고가 발생한 때

상법은 기간만 정하고 시작점은 말하지 않습니다. 그 자리를 민법이 채웁니다. 민법은 소멸시효가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때부터 진행한다고 정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보험금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는 때가 언제인지가 남습니다.

법원은 오랫동안 같은 답을 유지해 왔습니다. 보험금청구권은 보험사고가 발생하면 그때 구체적인 권리로 확정되므로,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소멸시효는 보험사고가 발생한 때부터 진행한다는 것입니다.

시효 완성일 = 보험사고가 발생한 날부터 3년이 되는 날

여기서 자주 어긋나는 지점이 있습니다. 시작점은 보험사에 서류를 낸 날도 아니고, 보험사가 지급을 거절한 날도 아니며, 병원비를 모두 정산한 날도 아닙니다. 청구나 거절은 권리를 행사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일 뿐, 권리가 생겨난 시점을 뒤로 미루지 못합니다. 사고가 난 날에 이미 시계가 돌기 시작했다고 보는 편이 실제에 가깝습니다.

3. 예외가 인정되는 두 가지 요건

원칙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상황이 있습니다. 사고가 났다는 사실 자체를 알 수 없었던 경우입니다. 법원은 보험사고가 발생했는지 여부가 객관적으로 분명하지 않아 청구권자가 과실 없이 그 발생을 알 수 없었던 때에는, 청구권자가 사고 발생을 알았거나 알 수 있었던 때부터 시효가 진행한다고 봅니다. 두 요건이 함께 갖추어져야 하며 하나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원칙이 그대로 적용되는 경우

  • 사고 발생: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상태
  • 청구권자의 인식: 사고를 알았거나 알 수 있었던 상태
  • 시효 시작일: 보험사고가 발생한 날

 예외가 인정되는 경우

  • 사고 발생: 발생 여부가 객관적으로 분명하지 않은 상태
  • 청구권자의 인식: 과실 없이 알 수 없었던 상태
  • 시효 시작일: 사고를 알았거나 알 수 있었던 날

 예외는 좁게 인정됩니다. 사고가 났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는데 그것이 약관에서 정한 보험사고에 해당하는지 몰랐다거나, 그런 담보가 계약에 붙어 있는 줄 몰랐다는 사정은 여기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몰랐던 대상이 사고의 발생 자체여야 하고, 모른 데에 과실이 없어야 합니다.

4. 후유장해 악화와 재해사망의 기산점

실제 분쟁은 이 경계에서 벌어집니다. 두 사례는 기산점 판단이 어떻게 갈리는지 보여 줍니다.

후유장해 담보에는 사고를 당한 날부터 180일이 지나도록 치료를 계속해야 하는 상태라면 그 기간이 끝나기 전날의 진단으로 장해 정도를 정한다는 조항이 들어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조항 때문에 시효도 180일이 지난 날이나 실제로 진단을 받은 날부터 시작한다고 볼 수 있는지가 다투어졌습니다. 법원의 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조항은 장해 정도를 정하는 방법일 뿐이어서 시효의 시작점을 뒤로 옮기지 못합니다.

다만 같은 판단에서 다른 결론도 함께 나왔습니다. 그때의 장해 상태에 따라 산정한 보험금을 이미 받은 뒤에 장해가 더 나빠졌다면, 추가로 받을 보험금청구권의 시효는 장해 상태가 나빠진 것을 알았거나 알 수 있었던 때부터 진행합니다. 처음의 사고와 나중의 악화가 서로 다른 시계를 가진 셈입니다.

재해사망보험금에서는 반대 방향의 판단이 있었습니다. 유족이 사망에 의료기관의 과실이 있었다며 재해사망보험금을 구한 사건에서, 법원은 사망한 때 또는 적어도 유족이 형사고소를 한 때부터 시효가 진행했다고 본 원심의 판단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사고의 원인을 따져 보는 과정이 남아 있다는 사정만으로는 시작점이 미뤄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두 사례를 나란히 놓으면 경계가 보입니다. 보험금을 얼마로 정할지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는 사정은 시작점을 옮기지 못하지만, 청구할 대상 자체가 새로 생겨난 사정은 별도의 시작점을 만듭니다.

5. 시효를 중단시키는 세 가지 사유

시효는 흐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멈추기도 합니다. 민법은 소멸시효가 다음 사유로 중단된다고 정합니다.

  • 청구: 재판상 청구와 재판 밖의 최고
  • 압류·가압류·가처분: 채권 보전을 위한 집행 조치
  • 승인: 채무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표시

중단의 효과는 시계를 잠시 세우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중단될 때까지 지나간 기간은 아예 계산에 넣지 않고, 중단 사유가 끝난 때부터 기간을 처음부터 다시 셉니다.

중단 뒤 완성일 = 중단사유가 끝난 날부터 다시 3년이 되는 날

주의할 것은 최고입니다. 보험사에 서류를 내고 지급을 요구하는 일은 재판 밖의 청구, 곧 최고에 해당합니다. 최고만으로는 6개월 안에 재판상 청구나 압류, 가압류, 가처분 등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중단의 효력이 없습니다. 반면 소송으로 판결이 확정되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판결로 확정된 채권은 원래 짧은 시효에 해당하던 것이라도 시효가 10년으로 늘어납니다.

6. 심사 지연과 지급 거절 사이에 흐르는 기간

청구서를 넣었으니 이제 기다리면 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심사가 길어지는 동안에도 기간은 계속 흐릅니다. 상법은 보험금 지급에 관해 약정한 기간이 있으면 그 기간 안에, 없으면 사고 발생 통지를 받은 뒤 지체 없이 지급할 금액을 정하고 그 정해진 날부터 10일 안에 지급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 조항은 보험사가 지켜야 할 기한이지 청구권자의 시효를 멈춰 주는 장치가 아닙니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청구권자 쪽에 붙는 의무도 있습니다. 상법은 계약자나 피보험자, 수익자가 보험사고의 발생을 안 때에는 지체 없이 보험사에 통지를 발송하도록 정하고, 통지를 미뤄 손해가 늘어난 부분은 보상에서 빠지도록 하고 있습니다.

지급이 거절된 뒤도 마찬가지입니다. 거절 통보를 받은 날부터 3년이 새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시계는 여전히 사고가 난 날에서 출발한 그대로 움직입니다.

반대로 기간이 다시 시작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보험사가 일부라도 지급하거나 지급할 채무가 있다는 뜻을 표시하면 승인에 해당해 시효가 중단됩니다. 금융감독원에 분쟁조정을 신청하는 것도 시효를 중단시킵니다. 금융소비자 보호에 관한 법률은 분쟁조정 신청에 시효중단의 효력을 인정하고, 양쪽이 조정안을 받아들이거나 조정이 이루어지지 않고 절차가 끝난 때부터 기간이 새로 진행한다고 정하고 있습니다.

7. 시효 완성의 효과와 증명책임

3년이 지나면 권리는 소멸합니다. 그런데 시효가 완성되었다는 사정이 저절로 작동하지는 않고, 그 이익을 얻는 쪽이 내세워야 합니다. 법원은 소멸시효 기산점에 관한 증명책임이 시효의 이익을 주장하는 사람에게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보험사가 시효 완성을 이유로 지급을 거절하려면 언제부터 기간이 시작되었는지를 보험사 쪽에서 밝혀야 한다는 뜻입니다.

시효의 이익을 미리 포기하는 약정은 효력이 없습니다. 계약을 맺는 단계에서 청구 기한을 앞당겨 두는 방식이 통하지 않는 이유입니다. 반대로 시효가 완성된 뒤에 보험사가 그 이익을 스스로 포기하고 지급하는 것까지 막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3년이 넘었다는 사정만으로 모든 문이 닫혔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1. 보험사고가 발생한 날을 진단서나 사고 기록으로 특정합니다.
  2. 그날부터 3년이 되는 날을 달력에 표시합니다.
  3. 중간에 서류 접수나 일부 지급이 있었는지 확인합니다.
  4. 분쟁조정을 신청한 이력이 있으면 그 시점을 함께 적습니다.
  5. 재판 밖의 최고만 해 둔 상태라면 6개월 기한을 함께 셉니다.

기간을 다투게 되는 자리는 대부분 기록이 없는 자리입니다. 언제 진단을 받았는지, 언제 서류를 냈는지, 어떤 답을 언제 받았는지가 남아 있으면 시작점을 두고 벌이는 다툼은 크게 줄어듭니다. 3년은 넉넉해 보이지만 사고가 난 날에서 이미 흐르기 시작한 3년입니다.

답글 남기기